sitemap_logo
sitemap_contents
<2014년 추모 현수막>
그대, 거짓말처럼 다시 오길
봄날은 꽃을 피우고 구름을 그려 놓고 따뜻한 바람을 불러왔는데
너, 어디 가서 돌아오질 않으니
너를 부를 때마다 내 가슴 속에서 떨어지던 무수한 꽃잎처럼
영영 돌아오질 않으니,
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이 있고
네가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가 있고
네가 벌써 피워 올린 초록의 나무가 있는데,
네가 돌아와서 할 그 모든 것들을 남기고
너는 왜 더 멀리 가버렸니?
새 봄처럼 다시 올 내 친구들, 네 꿈과 슬픔마저 내가 지고 갈 것,
잊지 않기 위해 애쓰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할 것,
네가 돌아오지 않는데도 거짓말처럼 다시 오는 봄마다.
잘 가. 안녕. 또 보자. 친구.
그리고 소중한 목숨을 잃은 모든 분들을 기리며'
<2015년 추모 현수막>
그 날 이후
진은영(시인)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갈 때 핸드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다 어울리는 우리 엄마에게 검은 셔츠를 계속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포근한 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또 한숨을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아이
제일 큰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어쩌면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아빠! 엄마! 벚꽃 지는 벤치에 앉아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를 잘 치는 소년과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들과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내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속에 자주 못가도 슬퍼하지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마
아빠, 내가 여기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언니 고마워
나와 함께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게 될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다시 그 곳을 노래해야 합니다
이창훈(시인)
1.
힘차게 ‘부응~~’하고 떠났던 배가
304명의 부음(訃音)을 전하고 맹골바다 차가운 심연으로
가라앉았던
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동안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겨울
다시 봄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의 목소리
그 낯익은 속삭임은 일 년 내내
이 땅 방방곡곡을 삐라처럼 무슨 진압군처럼 떠돌았지만
이 땅 여기저기에
노란 리본을 매단 나무 기둥을 세우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
세월이었습니다
2.
그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길
더 오래 전
불길 속으로 타들어간
남일당의 재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답고 화려한 빌딩의 숲에 앉아
때묻은 지폐를 펄럭이며 만지작 거리는
바리새인들
‘그것은 하나의 사고’
‘어쩔 수 없는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슬퍼는 하되 ‘가만히 있으라’고
‘그 곳을 노래하지 말라고’
그들의 세치 혀가
지겨운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동안
과연 무엇이 변했을까요?
하나 둘 광장의 초를 끄고
쓸쓸하게 남겨진 조등을 뒤로 한 채
그 먹먹함 그 망연함
그 뼈아픔을 가슴 깊은 곳에 묻고
하나 둘 일상의 저녁으로 귀가하는 동안
도대체 무엇이 그 누가 변했을까요?
3.
물론 우리는
남겨진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남겨진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얼굴을 씻기고 밥을 먹이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며
학교에 보내고
웃고 떠들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을
이 사소한 일상을 지켜야 합니다
소중하게 꽃피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소함 속에서
지금 여기 없기에
함께 할 수 없기에
그 사소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거기 채 피지 못한 꽃들을
아프게 떠올려야 합니다
아프지만 맹골바다의 심연을 떠올려야 합니다
아직도
어두운 맹골바다의 심연에서 떠돌고 있을
2학년 1반 조.은.화
2학년 2반 허.다.윤
2학년 6반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두 분 선생님
권.재.근 님, 그 분의 일곱살 아들 혁.규
그리고 이.영.숙 님
이 아홉 명의 영혼을 잊지 말고 불러야 합니다.
지금 여기로 데려와야 합니다
지금 여기
여전히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팽목항과 안산의 크고 작은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이 땅의 부모님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켜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선 자리에서
다시 그때 그 곳을 노래해야 합니다
4.
이 땅
산수유 나무의 몸마다 노란 꽃잎들이
거기 그때의 아이들처럼
말간 얼굴을 내미는
봄
다시
나의 마음 속에
너의 마음 속에
우리들의 마음 속에
초를 켜야 합니다
돈과 경쟁과 권력과
죽음의 혀가 날름거리는
이 땅의 어둠 속에서
다시
우리의 초를 켜야 합니다
우리의 등을 노란 기둥에 매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의 노를 힘껏 저어야만 합니다
그 곳을 노래하지 말라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다시
그 곳을 노래해야 합니다
쓰고, 낭송해 주셨던 시.